기원후 1세기에 활동한 '예수'라는 종교인을 구원자로 믿는 종교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종교이기 때문에 진곽인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소하지만
인천진산과학고등학교의
교가 가사 중
이 세상 소금되리 정의의 보람은 예수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중략)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1)
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 자신이 가진 맛으로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소금처럼, 사람은 신으로부터 받은 능력(과학 잘하는 재능, 수학 잘하는 재능, 기계를 잘 다루는 재능, 좋은 성품 등등...)으로 세상에 이롭게 산다는 뜻이다.
사실 이 문서의 존재 근거를 위해 나무위키 문서를 뒤져서 찾아냈다. 기독교가 믿는 신 이름은 유대인들이 믿는
야웨이다. 여호와, 야훼, 하나님, 하느님, 주님 모두 같은 뜻이다. 기독교에서 야웨는 우주의 물리 법칙과 사람을 창조하고 이 세상을 주관하는 존재이다.
기독교의 신은
삼위일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삼위일체는 신이 '성부(아버지)', '성자(아들=예수)', '성령(영혼)'의 세 캐릭터
(2)로 되어 있지만, 세 캐릭터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교리이다. 세 캐릭터는 분명히 구분된다. 따라서 셋은 본질은 같으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자체가 같은 것은 아니고,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역시 본질은 같지만 둘 자체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셋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서로 사랑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3명인 것도 아니고 같은 캐릭터가 상황과 장소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도 아니다. 정리하자면 기독교의 신은 유일신이 있고, 그 신은 본질상 동일한 세 캐릭터로 존재한다.
(3)(4) 이 중에 성자 하나님이 기원후 1세기 유대 땅에서 활동했던 예수라고 본다. 정통 기독교에선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라고 본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처럼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나서 신의 피도 반쯤 있고, 인간의 피도 반쯤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완전하게 신이기도 하고 완전하게 인간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성과 인성은 각각 존재하긴 하지만 두 본성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도, 둘이 합쳐서 변형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중인격자처럼 두 본성이 엄격하게 나눠져서 신성이랑 인성이 자기 주장하면서 싸우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5) 이것 역시 이해하려고 해 봤자 정신 건강에 좋지 않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겨도 된다.
(6) 아래 문단은 파란색 십자가 버튼을 눌러야 보인다. 살짝 여담에 가깝기 때문에 숨김 처리했다.
2.1.1. 신의 이름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 ⊕
(개신교) 교회에 다니는 진곽인들은 흔히 자신이 믿는 신 이름을 '여호와'라 부르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가톨릭 성당에 다니는 친구들도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야훼'인 것임을 아마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술적으로 분석한 결과 그 신의 발음으로는 '야웨' 또는 '야ㅎ웨'정도가 가장 유력해 보인다. 2000년 가까이 사람들은 이 신의 발음을 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옛날,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십계명이라는 법을 원칙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십계명은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이끌고 탈출해 사막을 떠돌던 후, '시나이 산'에서 야웨에게 직접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십계명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는데...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
(7)
이 구절은 원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욕하듯이 부르면 안 돼." 정도로 해석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야웨의 이름을 자유롭게 불렀고, 이름 지을 때에도 자주 사용했다.
(8) 그러나 유대인들의 역사를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 일어났으니,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라는 강대국이 유다 왕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유다 땅이 처참히 파괴되고, 가장 그들이 중요히 여기던 예루살렘의 중앙 성전이 활활 불탔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갔다.
고대 근동에서 국가 간의 전쟁은 곧 그 국가가 믿는 신들 사이의 전쟁이기도 했다. 그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유다가 믿던 신 야웨가 바빌로니아의 신들에게 탈탈 털렸다는 이야기다. 유대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아! 우리가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아서 야웨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구나! 이제부터는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엄청 철저하게 지켜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종교적 율법들을 철저히 지키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이는 점점 도를 넘기 시작했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적으로 부르지 못한다고? 혹시 모르니까 그냥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겠다! 아예 안 부르면 실수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길 일도 없겠지."
그렇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아예 야웨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9) 다만 1년에 딱 한 번, 실수로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대속죄일' 행사 때, 최고 종교 지도자였던 '대제사장'만 성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부를 수 있었다. 이렇게 '그 발음'은 비록 대제사장들 사이에서만 내려져오긴 했지만 어쨌든 그 명맥을 잇고는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유대 땅은 시간이 흐르며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유대인 독립운동가들은 기원후 66년 로마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세계 최강의 로마군은 반란을 진압하며 다시 지은 성전을 불태운다. 성전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던 제사장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흔적도 없이 붕괴된다. 그리고 이 발음 역시 제사장들과 함께 영원히 잊혀지는 듯했다.
여기서 궁금할 수 있는 것이 그냥 성경에 쓰인 글씨 보고 읽으면 되지 않냐는 것인데, 하필이면
유대인들이 쓰던 히브리 문자는 모음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자음 'YHWH' 밖에 알 수가 없었다. 한편 그 사이 생겨난 기독교인들이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발음 하나를
창조한다. '나의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아도나이'의 모음을 그대로 'YHWH'에 옮겨서 '여호와'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서 개신교 전통에서 널리 사용하는 발음 '여호와'가 유래되었다.
현재는 여러 학자들의 재구 노력으로 '야웨' 또는 '야ㅎ웨'가 정설이다. 그리스 문자로 발음을 흉내내려던 고대 기록들을 찾았다.
기독교에서는 유일신 야웨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창조했다고 본다. 창세기에서 사람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서구적 인권, 인간 존엄성 논리의 배경이 되는 내용이다.
(10)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여러분이 과학고생이라서 특히 와닿는 문제일 것이다. 창세기 1~2장엔 야웨가 6일에 걸쳐서 첫째 날엔 빛, 둘째 날엔 바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반면 현대 과학에서는 '우주는 138억년 전 빅뱅으로 탄생했으며, 생명은 유기물이 진화하면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교회들은 창세기 1~2장에 적혀 있는 문자 그대로 '6일 간의 창조'를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창조론이 6일 창조론만 있는 것이 아니며, 다음과 같은 여러 스펙트럼이 있다.
6일 창조론 : 창세기 1~2장의 창조 설화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부류이다. 가장 보수적이다.
오래된 지구론 : 사람과 생물을 하나님이 특별히 만든 건 맞지만 지구는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빅뱅 이론과 지질학은 받아들이고 대진화론은 거부하는 부류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히브리어 단어 'yom'을 날이 아니라 특정 기간이라 해석한다.
(11) 조금 보수적이다.
진화적 창조론(=유신진화론)
온건한 부류 : 하나님이 빅뱅과 진화의 방법을 이용해 창조했다는 부류이다. 온건한 부류는 진화와 빅뱅에 특별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따고 본다. 약간 진보적이다.
급진적인 부류 : 하나님이 빅뱅과 진화의 방법을 이용해 창조하긴 했지만, 일단 세상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그냥 물리 법칙에 따라 알아서 돌아가게 놔 두었다는 부류이다. 진화를 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이벤트들은 사람을 만들려는 어마어마한 계획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만든 물리 법칙에 따라 세상이 돌아간 결과라고 본다. 가장 진보적이다.
유신진화론에 관하여서는 매우 많은 신학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죄의 본성이다.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죄의 본성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근데 그 '죄의 본성'이 정확히 뭘 말하는 지에 따라 신학자들마다 입장이 다르다.
원죄론에 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다.
일단 이 원죄론의 배경이 되는 내용을 설명하자면 '창세기' 3장에 적혀 있다. 위의 창조 과정에 끝무렵, 하나님은 사람(남자와 여자)을 만들었다. 남자의 이름은 아담이고 여자의 이름은 하와였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이라는 아주 이상적인 낙원의 관리자로 삼았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내가 만든 이 세계를 잘 다스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과일들은 맘대로 먹어도 좋지만 에덴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라는 과일만은 먹지 말라고 했다. 선악과를 먹으면 선과 악이 뭔지 알게 되는데, 그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뱀이
(12) 여자에게 저 선악과를 먹으면 선과 악을 알고 너도 하나님처럼 높아질 수 있다고 유혹했다. 여자와 남자는 그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었다. 이를 본 하나님은 그들을 크게 꾸짖고 에덴 동산에서 내쫓았다. 그 후로 인간들은 먹고 살기 위해,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고 고생해야 했다.
첫째는 '유전적 원죄론'이다. 이걸 주장한 유명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신학자다. 그는 아담이 첫째로 죄를 지은 이후로 남녀 간의 일반적인 관계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그 죄를 유전적으로 물려받는다는 입장이다. 딱 봐도 연좌제 논란이 가장 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는 '대표성 원죄론'이다. 이 이론에선 아담이 죄를 지을 당시 그는 온 인류의 대표였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죄에 다 함께 연대 책임을 진다고 본다.
셋째는 '경향적 원죄론'이다. 이 이론에선 사람들은 아담의 죄를 지으려는 경향성을 물려받았다고 본다. 즉 죄를 안 짓고 싶어도 마음이 계속 죄를 짓는 쪽으로 기울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 교리는 현대 사회에서 논란이 많다. 연좌제
(13)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몇 가지 이견이 있다. 첫째는, 인간이 물려받은 건 죄를 지으려는 경향성일 뿐 죄에 대한 책임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법정에서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처벌하면 당연히 안 되겠지만, 주변 가족들이 계속 죄를 지어서 나도 따라서 죄를 짓는 건 마땅히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경향적 원죄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래서 아담이 처음 지은 원죄가 그 후손들은 원죄에 대한 책임이 있느냐 vs 없느냐가 토론 거리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개신교인 '장로회'에서는 책임 있다고 주장하고, 그 다음으로 많은 개신교인 '감리회'나, '가톨릭(=천주교)'은 '책임 없다. 그들이 물려받은 건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경향성이다.'라고 주장한다.
신이자 '하나님의 말씀(λόγος)
(14)' 성자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의 몸뚱아리인 '예수'로 이 세상에 왔다는 교리이다. 이것을 다룬 요한의 복음서 1장 14절에선, '말씀(λόγος)이 살덩어리(σὰρξ)
(15)가 되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표현한다. 요한의 복음서가 쓰일 당시 지중해 세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말씀(λόγος)을 고귀하고 고상한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원리, 근원적인 법칙으로 이해했다. 근데 그것이 낮고 낮은 살덩어리
(16), 언젠가 썩어질 물질이 되어 이 물질 세계에 들어왔다고 선언하는 것은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성육신의 의미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가장 높은 신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낮아질 만큼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는 신의 말씀(λόγος)이 세계에 직접 와서 자신을 알려준다(계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셋째로는 완전한 신이 불완전한 인간을 대하기 위해, 불완전한 인간의 눈높이로 낮아지고,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관한 교리는 다음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기원후 30년 혹은 33년경, 예수는 유대교 랍비
(17)로 활동하며 기존의 유대교의 틀에 벗어난 여러 과격한 주장을 한다. 이에 반발한 주류 유대교
(18) 지도자들은 당시 유다이아 속주 총독인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걸어 사형을 요구한다.
(19)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의 민심을 고려해 십자가형을 허락한다. 십자가형은 로마에서 실시하던 사형 중에서도 매우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서 천천히 죽이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은 며칠 동안 버티면서 고통 받을 수도 있다. 게다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헐벗고 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므로 매우 수치스러운 형벌이기도 했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지 얼마 되지 않아 죽는다.
이런 끔찍한 사건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 꽃 피었다. 예수가 받은 고난은 기독교 문화 전체에 걸쳐서, 또 기독교 문화권에 있는 서양의 각종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주었고, 현재도 활발히 그 의미가 연구되고 있다. 기독교의 주요한 세 분파인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는 이에 관해 각각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근데 이건 부활이랑 합쳐서 봐야 완전해지므로 이따가 다루기로 하자.